현상이 바로 실상이다

1. 풍수지리와 생명사상

동리산 태안사는 선라 구산선문(九山輝門)의 하나이다.

문경 봉암사와 함께 선 수행의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져 오는 한국불교의성지이다.

태안사가 구산선문의 역사적인 전통을 오늘에 다시 꽃피우게 된 것은 평생을 위법망구(罵法忘龜)의 대용맹심으로 고행정진 하시어 선 · 정 · 율 · 밀(輝浮律密)의 정수를 체득하신 청화선사(淸華輝師)의 법향(法香) 때문이리라.

큰스님은 정통선과 원통불교를 선양하시며 상불경행(常不輕行)으로 사부대중을 제접하신다. 태안사를 참배하는 불자들은 큰스님의 가르침과 지나온 행장을 통해서 자아의식과 관념， 욕망의 세계를 넘어선 무아(無我). 무애(無碍) . 무욕(無欲)의 해탈세계를 엿보게 된다. 큰스님의 가르침과 실천행은 원효 · 보 조 · 서산으로 이어지는 한국불교의 전통이며 우리시대의 혼미를 밝혀줄 한 줄기 빛이다.

동리산 태안사의 개산조인 혜철국사의 사리탑 아래에는 금강 선원이 자리 잡고 있다. 선원의 건축을 자세히 보면 기둥의 길이가 각각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동리산의 기운이 청룡 등을 타고 흘러 내려오는데 산의 기운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지반을 고르지 않고 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선원을 건축한 까닭이라 한다.

또한 맞배집의 선원 건물 아래편으로 한 칸을 달아내었는데 이는 흐르는 기운이 빠져 나가지 않게 붙잡아둔 건축양식이라 고한다.

조계산 송광사가 16국사를 배출하고 모범적인 수도도량으로 승보종찰의 영광을 차지하면서도 가난한 살림을 변하지 못하는 것은 산세와도 함수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조계산은 본시 좌청룡은 힘차게 뻗어 내린 반면 우백호는 빈약한 편이다 그런데 청룡 등은 훌륭한 인물을 키워내고 백호 등은 의식을 풍족하게 한 다는 것이다.

그래서 송광사의 옛 스님들은 부족한 백호 등의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백호 등의 주요 텃밭에 16국사의 부도를 봉안하여 맞은편의 제왕봉(帝王峰)과 모후산(母后山)의 기운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송광사의 말사인 천봉산 대원사(天鳳山大頂寺)는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봉소형국(鳳巢形局)’ 이다. 극락전 뒤의 문수봉이 봉황의 이마에 해당되고 양옆으로 펼쳐진 산자락이 두 손을 활 짝 펴고 자식을 맞이하는 어머니의 넓은 가슴이다. 이곳은 풍수지리에서 얘기하는 명당이 갖춰야 할 요소를 완전히 갖춘 천연의 성지이다.

몇 해 전 한국 천주교의 성지로 개발 중인 경기도 광주 천진암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기념관과 숙소， 대성당을 신축중인 공사현장을 보며 나의 팔목이 잘리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돌아온 기억이 있다. 산세의 형국은 차치하고， 커다란 산봉우리 하나를 장비를 동원하여 통째로 헐어내는 참혹한 광경을 보면서 동 · 서양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신(神)의 성전을 짓는다며 신의 몸을 파괴하는 인간의 무지를 생각하였다.

한국의 고찰들은 한결 같이 그 산의 지형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그 산을 더욱 빛내는 역할을 해 왔다. 우리의 조상들은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알았다. 우리 한옥의 공간구조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호흡하는 조형물이다. 대자연은 바로 인간의 큰 몸이라는 생각이 풍수지리사상을 낳게 된다. 모든 인간이 어머니의 품에서 성장하듯이 대지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다. 좌청룡 우백호(左靑龍右白虎)와 배산임수(背山臨水)가 제대로 갖춰진 천연의 지형은 바로 어머니가 두 팔을 벌려 자식을 감싸 안은 모양이다.

고향을 생각하고 어머니를 생각할 때 인간은 안온함을 느끼듯이 그러한 자연의 품에 안길 때 평안함을 얻게 된다. 번뇌의 인간이 침묵의 대자연 속에서 평안을 느끼듯이 내면의 공(空)을 체험하고 침묵의 공간을 간직한 선지식의 존재는 우리를 근원 적인 평안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청정승보(淸淨曾寶)는 번뇌와 죄업으로 오염된 중생들에게는 최상의 복전(福田)이요， 으뜸가 는 보배라고 부르는 것이다. 침묵의 공간을 성취한 선지식은 끝없는 자비의 파동으로 중생의 번뇌를 흡수하는 자석과 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2. 생명운동과 아미타신앙

현대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간 생활의 편리함과 안락함을 제공했지만 그로 인한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보다 행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경쟁의식과 갈등만을 심화시키고 있으며，보다 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인간을 자멸로 이끌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며칠 전 대원사를 찾아와서 불교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공장의 연기와 자동차의 매연으로 인해 대기가 고통 받는 소리， 공장의 폐수로 인한 하천의 신음소리， 골프장 건설과 도시 주변의 아파트 건설로 인해 산중턱까지 파헤쳐진 산의 비명 소리， 농약과 쓰레기의 범람으로 고통 는 대지의 신음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묵묵히 있던 학생 중 하나가 간신히 말하였다.

“자연의 신음소리를 어떻게 하면들을 수 있습니까.?"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들을 수 있지만 특히 도시의 큰 병원에 가면 자연의 신음소리를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지요. 대기오염으로 인한 폐병질환으로 앓는 사람들， 오염된 식품과 식수로 인한 갖가지 질병， 자연적 리듬의 파괴에서 오는 각종 정신질환， 이름도 알 수 없는 각종 공해병을 앓는 사람들의 고통이 바로 대기와 하천이 앓는 신음소리입니다.

우리 동양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하늘과 땅은 나와 더불어 한 뿌리이고， 온 누리는 나와 더불어 한 붐이다’ 고 했습니다. 나의 큰 몸인 자연이 앓는데 인간 홀로 건강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파괴되고 오염되는 자연은 자신의 아픔을 인간의 폼을 통하여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계곡에 쓰레기를 버리고 하천에 폐수를 방류하는 일은 바로 나의 위장에 쓰레기를 버리고 나의 혈관에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환경오염과 과소비의 문제도 본질적인 문제의 자각과 인식 없이는 치유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것이 아니고 모든 생명은 자연환경과 더불어 끝없는 연결고리로 우주 끝까지 이어진 하나의 대생명체임을 깨닫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이 같은 연기의 도리를 깨달을 때 나만 좋으면 된다는 이기심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자해행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해줄 때 내 자신이 기뻐지고 이웃을 고통스럽게 하면 나 자신이 편안치 못함을 일깨워줍니다.

불교는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모든 생명이 깨우쳐 받들어야 할 생명의 진실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눈떠갈 때 끝없는 이웃의 존재에 대한 자비심이 개발되고 우주에 가득한 부처님 의 생명력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 같은 우주의 대생명을 인격화 하여 ‘아미타불’ 이라고 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은 모든 인간이 돌아가야 될 생명의 고향입니다"

오늘의 시대야말로 부처님의 연기의 도리를 깨달아야 할 때 이다. 오늘의 시대야말로 대승보살의 자비가 꽃피어나야 할 때 이다. 오늘의 시대야말로 생명운동으로서의 아미타 신앙이 불꽃처럼 일어나야 할 때이다.

실상(實相)에 있어서는 모두가 평등하며 대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도 모든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해 대체로 눈앞에 나타난 현상만을 보고서 이것은 이득이고 저것은 손해다 등으로 제멋대로 계산하여 불선(不善)의 마음을 일으켜 갖가지 나쁜 행위를 저지르고서 그로 인해 온갖 고통을 받으며 영원토록 이 그릇된 경계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살 여러분， 이것을 똑바로 밝혀서 알고 중생에 대해 큰 자비심을 일으켜 모든 사람들을 고통에서 완전히 건지겠노라고 굳게 서원 하십시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보다 깊이 일체의 물질과 현상이 지니고 있는 참모습을 밝혀내는 수행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근기나 성질， 욕망의 형태도 똑바로 살펴보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사람들의 근기도 성질도 욕망도 천차만별인 것이므로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펴는 가르침도 마땅히 천차만별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천차만별한 가르침도 근원적으로는 하나의 진실에서부터 나온 것 이어야 합니다. 그 단 하나의 진설이란 일체의 차별이 없고〔無相〕 차별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不相). 이와 같이 일체의 차별을 떠난 근본적인 실재야말로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하 나의 진리， 즉 법(法)이니 이것을 실상(實相)이라 이름 하는 것입니다.

《무량의경》설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