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에 눈꽃 피고 술 한 잔에 저녁놀 어린다 맑은 차 향기 속에 솟아나는 하늘꽃이여 조계가풍 禪茶 대이은 자진 원오국사 부도 우리나라 선풍의 큰줄기를 이루는 조계산 16국사는 가는 곳마다 목우자의 선풍을 이루고, 그 선풍 속에 차마시는 가풍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스님들의 일과가 참선하고 염불하는 여가에 밥마시고 차마시는 일이고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찰에서 오래된 차밭을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오래되었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40~50년 전, 차문화가 오늘날처럼 대중들 앞에 나오기 전을 말한다. 오래된 야생의 차밭은 차를 마시는 차인들에게는 꿈속에서도 그리워 하는 곳이다. 사찰을 방문할 때면 남들이 오래된 불당이나 석물에 눈이 팔릴 때, 나는 대숲으로 동백숲으로 들어가 차나무를 찾아서 함께 온 다른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 지인이 나에게 일러주었다. 차나무가 숲을 이룬 절이 있다고, 그것도 500~600년 이상의 수령을 자랑하는 차나무라고. 그곳은 보성군 천봉산 대원사이다. 내가 10 여 년 전 처음 보성군 천봉산 대원사를 방문하였을 때, 극락전과 자진원오국사(慈眞圓悟國師) 부도 그리고 요사채가 덩그렇게 놓여있는 쓸쓸한 절이었다. 그러나 그 쓸쓸함 속에서도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듯, 부드러운 산등성이 속에 봉황이 날개를 편 곳에 안긴 대원사의 푸근함은 겨울 속의 봄날이었다. 그리고 자진원오국사 부도옆의 산등성이에 푸르게 자라고 있는 제법 굵기를 자랑하는 차나무는 나를 흥분시켰다. 언젠가 한번 다시 찻잎이 필 때 다시 와서 차를 만들어 보리라… 그리고 또 5~6년이 흘렀다. 기어코 〈향기를 찾는 사람들〉 회원들인 장희석, 이익성과 함께 대원사에서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들었다. 아침 한나절 찻잎을 땄지만 한 광주리 남짓, 야생찻잎이라, 아니 게으른 손의 탓인지 좀처럼 광주리 안의 찻잎이 불어나지 않았다. 마치 손바닥이 비쳐보이듯 한지처럼 얇고 부드러운 찻잎을 딸 때마다 여느 차밭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맑은 향기가 터져나왔다. 차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차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향기의 축제에 초대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 이! 차를 대원사 부도의 주인공인 자진원오국사도 마셨을 것인데…. 극락전의 부처님과 부도에 차한잔을 올렸다. 원오국사(1215-1286)는 조계산의 즉 보조(普照)·진각(眞覺)·청진(淸眞)·진명(眞明) 국사의 대를 이은 5세 국사이다. 백운산에서 보조국사와 진각국사의 만남에 차한잔이 있었고, 원오국사의 대를 이은 원감국사(圓鑑國師1226-1292)가 남긴 차시에서 나타나는 조계가풍의 선차는 한마디로 고려시대 차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스님들이 머물던 사찰 가운데 다원이 조성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스님들이 직접 차를 만들어 마음벗들에게 선물을 하였다는 사실은, 사찰 둘레에 다원이 조성되었을 것을 시사한다. 이곳 대원사도 그 같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원오국사의 휘는 천영(天英) 우리 말로 풀어보면 하늘꽃이다. 그 하늘꽃과 같은 스님이 우리에게 남긴 일화는 걸림없는 마음자리를 알게한다. 충렬왕 12년(1286) 2월 12일에 청을 받아 불대사에 이르러 장로를 불러서 말씀하였다. “이 늙은이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그대들 잘살아라…” 이에 어떤 스님이 나와 물었다 “환신의 껍데기를 벗으면 어느곳을 향하여야 서로 보게 됩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태어남이란 마치 바지를 입음이요, 죽음이란 마치 치마를 벗음이니 어떤 것이 입고 벗는 사람인고?” 한동안 침묵하시다가 다시 말씀하였다. “보지 못했는가?’ 목우자께서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느니라’라 하신 것을….” 나고 죽는 것을 마치 옷 한 벌 갈아입는 것처럼 살다간 원오국사. 그에게 붙혀진 자진(慈眞)이란 시호가 어울리게, 우리의 어리석음 앞에 다시 한번 부드럽게 타이른다. 목우자 보조국사가 이미 이 자리를 밝혀놓았지 않는냐고, 그는 죽음 앞에서도 바로 보조의 후예임을 밝혀 놓았다. 이렇듯 원오국사는 열반에 들고 대원사의 서쪽 등성이에 원국국사의 탑을 세웠는데, 무지개가 홀연히 조계산의 남쪽 봉우리에서 뻗어 탑에 이르고 다른 하나는 탑의 앞산 봉우리에서 뻗어 탑에까지 이르러 두 무지개가 한데 어울렸다고 한다. 흔히 쌍무지개라고 하면 암무지개 숫무지개라고 하여 겹으로 생기는데, 신기하게도 마치 고무공이 튕기듯이 무지개가 이어졌다는 것은 그가 바로 조계산의 정맥을 이은 후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 일이라 하겠다. 대원사 원오국사부도 옆 산등성이 야생차밭의 차나무 앞에 서면, 공간의 무지개가 아니라 시간의 무지개가 되어 우리에게 화두처럼 다가온다. 이 차나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동안 우리는 차나무의 기원에 있어 〈삼국사기〉의 대렴공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 일원에 심었다는 828년(흥덕왕 3)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는 기록으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떠올린다. 한마디로 신라중심의 차문화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곳 백제의 옛 땅에 오면 우리차문화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요청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른바 재야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대륙백제 즉 오늘날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황해연안의 땅이 백제의 영토였다는 사실이다. 그 백제의 영토에 차나무 산지가 포함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차와 향의 유입이 불교유입과 중국(물론 당시의 양나라, 당나라) 과의 교류를 통하였다면, 불교와 외교적 선진국인 백제가 차문화의 꽃피움이 충분히 앞설 수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한 예로 익산의 시다산(施茶山)이라는 지명이 있다. 그런데 요사이 보성은 일제시대에 차밭이 조성된 것으로만 알고 있어, 전통차의 시배지 하동, 재배차의 시작은 보성이라는 등식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 깊이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문화의 지평을 여는 일로는, 이와같은 일차원적인 시각은 위험한 일이다. 보성에는 득량면 송곡리 차밭골(茶田), 조성리 봉능리 차밭등(茶田登), 다산(茶山)등의 지명이 있고, 지금은 폐사가 된 징광사지가 있다. 고려 명종(재위 1170-1197)때 시인 김극기는 보성의 징광사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절은 높고 험한 곳에 자리했으니/어느때 이곳 절경을 찾아 이루었던가/ 깊이 들어가 어두운 곳을 벗어나서/고요히 앉아서 번뇌와 먼지를 씻네/향기로운 차한잔에 눈꽃피어나고/좋은 술한잔에 저녁 놀이 어리네/맑은 바람 옥자루를 따라 일고/ 시원한 바람 몸을 스치네 당시 선과 함께 차가 어울린 예로 보아, 입당전심의 선승들이 차를 가까이 하였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의 보성의 야생차밭으로 소문난 징광차밭은 이와같은 후광을 입고서 새로 조성된 차밭이지만, 대원사의 야생차밭은 그동안 스님들 사이에서 전승된 우리나라 전통의 야생차밭으로서 손색이 없다. 〈동국여지승람〉에서 이곳 보성의 토산품으로 차가 나와있는 것을 보면, 보이지 않는 기록의 맥락 속에서 오랜 전통이 이어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지워지고 묻혀져 안타까울 따름이다. ●함께 둘러볼 만한 풍광 티베트 박물관 주안댐의 강각리에서 이곳 대원사에 들어오는 길은 요사이 새로운 명물이 되었다. 10여년 전 차를 사랑한 당시 대원사의 여연스님이 대내에서 절에 이르는 길의 가로수로 벚나무를 심었던 것이 이제 제법 자라나 봄이 되면 꽃터널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길을 따라 오르면 지금의 대원사 현장스님이 꾸미는 지장도량으로서의 대원사와 염불선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천봉산의 아름다움이 비쳐보이는 연못에는 백련과 수련이 피어나고, 각종의 이색석물이 다가서는 사람의 발길을 끈다. 그런데 그것들이 모두 축소형이라, 〈베이비 --〉라는 이름으로 소개가 된다. 극락전 안의 관세음보살상과 달마상은 누구나 보고 감탄을 하지만, 극락전에서 원오국사 부도 쪽으로 그려진 한산습득상은 일부로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이곳 대원사에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티베트박물관이 설립되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어울림과 진리의 빛을 찾는 여러 만다라와 조각상과 함께 티벳의 풍물을 소개하는 사진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지장왕보살로 유명한 김교각을 위한 특별관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김교각스님은 안휘성 구화산에 우리나라 차나무와 우리의 볍씨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보성의 끝머리 회천면에 가면 대한다업에 조성한 대규모 다원을 만나게 된다. 각종 광고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요즈음 부쩍 찾는 사람들이 많다. 입구에 조성된 삼나무 숲길은 사람이 자연을 어떻게 가꾸는 가에 따라 풍광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다시 알게 되는 좋은 예이다. 그 향기를 맡으며 차한잔을 마신다. 달려온 하루가 온통 초록빛으로 기억될 것이다. 옷한벌 갈아입듯 우리 삶이 간결해질 수 없을까? 나는 차를 마시면서 더 많은 매듭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매듭을 푸는 차한잔을 마시고 싶다. 출처: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