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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문화 속 '돼지'

하얀연꽃

우리 전통문화 속 '돼지'
 

만봉 스님이 그린‘십이지신도’중 해신(亥神).
만봉 스님이 그린‘십이지신도’중 해신(亥神). /국립민속박물관

제사에 쓸 돼지가 갑자기 달아났다. 뒤쫓아 간 관리가 한 마을에 이르러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스무 살쯤 된 아름다운 여인이 씩 웃으면서 돼지를 잡았다. 이야기를 들은 왕이 밤에 몰래 그 여인을 찾아갔고, 여인은 이듬해 왕의 아들을 출산했다. 서기 208년(산상왕 12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은 '돼지 덕에 왕자를 낳았다'는 이야기다. 고구려 수도 국내성과 고려 수도 송악을 '점지'해 준 동물도 돼지였다.

우리 전통에서 돼지는 신화적 신통력을 지닌 부(富)와 복(福), 행운과 재운(財運)의 상징이다. 새해 첫 돼지날인 상해일(上亥日)에 문을 열면 한 해 동안 장사가 잘된다거나 돼지혈(穴)에 묘를 쓰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도 있다. 굿이나 고사를 지낼 때 상 위에서 웃는 역할을 하는 것도 돼지다.

'개·돼지'라고 부르면 욕설이 되지만 꿈에 본 돼지는 대단한 귀물로 친다. 용이 권력의 상징이라면 돼지는 재력의 상징이자 풍년과 다산(多産)의 의미까지 겸한다. 돼지 그림과 돼지코는 번창을 기원하는 부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것은 집에서 기르는 돼지가 가계 운영의 기본적 재원이었으며 '돼지 돈(豚)'이 '돈(money)'과 발음이 같은 것에서 연유한다. 한배에 여러 마리씩 새끼를 낳고, 잘 먹고 잘 자라는 강한 번식력과도 관계가 있다.

반면 '돼지같이 먹고 소같이 일한다' '돼지 멱따는 소리' '돼지 발톱에 봉숭아물 들인다' 같은 속담에서 보듯 돼지는 욕심 많고 더럽고 게으른 동물로 곧잘 묘사되기도 한다. '상서로움'과 '탐욕스러움'이라는 반대되는 속성을 한몸에 갖춘 동물이 바로 돼지였던 셈이다. 그 두 가지 속성의 접점도 있다. 민간요법에서는 소화불량 때 약 삼아 돼지 똥을 복용하는 일이 많았는데, 냄새와 자극이 강한 돼지에게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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