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님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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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대의 출판단지를 운영했던 <보성 징광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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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숙종 7년(1681년) 6월 5일 큰 태풍이 몰아쳤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뿌리 채 뽑히고, 집중호우로 가옥과 전답이 유실되었다.

전국적으로 많은 인명피해도 발생하였다.

 

 전라도 임자도에는 중국 선박이 태풍에 난파되어 떠밀려 왔다.

표류선에는 중국 선원들과 무역 물자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는 무역선이 태풍을 만나 임자도까지 떠밀려 온 것이다.

나주 관아에서는 배에 실려 있던 각종 물품을 수습하여 조정으로 올려보냈다.

불서는 1천 권이 넘고, 각종 불기도 많았다.

 

 송•원대 명품 도자기와 자단목, 중국 동전을 가득 실은 배가 신안 앞바다에서 좌초하여

수 많은 명품도자기를 뻘 속에서 인양한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신안 해저 유물>이다.

 

 조선 숙종때에는 대장경을 가득 실은 배가 임자도로 표류해 온 것이다.

그 당시 대만은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이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고, <멸청복명>을  외치며

정씨왕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때 일본 우지 만복사에는 명나라에서 망명한 은원선사의 제자들이 명나라 때 간행한

<가흥대장경>을 구해서 보내달라고 정성공에게 요청하였다.

2195부 1만 332권의 가흥대장경을 싣고 일본으로 향하던 배가 태풍으로 부서지고,

불경을 담은 목함들은 파도에 밀려 해안을 떠돌게 된 것이다.

 

 영광 불갑사에서 정진하던 백암성총스님께 그 소식이 들려왔다. 

백암스님은 관아로 올라간 불서 외에 흩어진 불경들을 수집하였다.

조선에 없던 귀한 불경들을 수집하는데 4년이 걸렸다.

55세에 이 불경들을 판각해서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서우너을 갖고

벌교 징광사로 들어왔다.

 

 그 당시 벌교 징광사에는 덕망 높은 침굉스님이 계셨고, 한지 생산이 가능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함께 왔다.

 

 징광사에서 제일 먼저 판각한 불서는 <정토보서>였다.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과 정토신앙의 요체를 정리한 책이었다.

잇따른 대기근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하고 민심도 흉흉했다.

 

 백암스님은 사람들이 정토신앙에 의지하여 안심을 얻고, 육신을 떠날 때는 행복한 마음으로

극락에 왕생하기를 염원하였다.

백암스님은 금화산 징광사에서 12종류 197권 5000판의 책을 간행했다.

이때 간행된 주요 불서는 사경지험기, 금강반야경소론찬요, 대명삼장법수, 대방광불화엄경소초 등이다.

화엄경소초의 간행은 18세기 이후 조선 불교계에 화엄학이 유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백암스님은 징광사에서 대장경 판각불사를 주도하면서 불학원을 열어 화엄산림법회를 열어

사부대중이 화엄의 장엄한 세계를 맛보게 하였다.

1692년에는 선암사 창파각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어 불법의 중흥을 염원하기도 하였다.

백암성총이 주도한 대장경 판가사업이 없었다면 조선후기 정토신앙과 화엄학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승려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강원 겨재 주석서인 <치문사기>를 남겼다.

간경문, 참서문, 염불문의 삼문수행도 백암에 의해서 체계가 형성된 것이다.

 

 오늘날 쓸쓸히 방치된 보성의 징광사는 조선불교의 위대한 큰 스승들이 주석했던 성역이었다.

백암성총, 침굉현변, 묵암최눌 등은 보성 징광사를 빛낸 대표적인 고승들이다.

       벌교 징광사에 남아있는 <귀부와 이수>이다.  비신은 사라지고 없다.

       화려한 조각 솜씨로 보아 왕사급 고승의 탑비로 추정 할 뿐이다.

 

 

 

경전을 판각하는 모습...

불교가 박해 받던 조선 숙종때 엄청난 판각불사를 이룰 수 있었는지는 불가사의 할 뿐이다.

 

 

벌교 징광사에서 판각된 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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