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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 초대 편집인을 찾아서

월간해인

스님을 가장 최근에 본 것이 언제였더라 헤아려 보니 벌써 십 수년 전이다. 스님이 이 곳 보성 대원사에 머문 지 12년 됐다고 하니 헤아림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현장 스님 하면 법련사와 불일서점과 불일회보가 먼저 떠오른다. 그때 현장 스님의 문서포교 현장이었던 경복궁 옆 낮은 기와집, 법련사는 이제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하였고, 당시 스님이 만들던 <회보>도 1년 전 폐간되고 다른 모습으로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스님은 우리의 의식 속에 아직도 그렇게 각인돼 있다.
지금은 문서포교의 현장을 떠나 수행과 기도생활을 하고 계시는 스님을 한번 꼭 찾아뵈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마음에 두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더니, 고맙게도 <해인>이 그 뜻을 이루게 해준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20년 <해인>지의 역사를 기념하며, <해인>의 문을 연 초대 편집자로서 스님을 찾게된 것은 의외였다. 문서포교사에서 본다면 스님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지만, 송광사 스님이라는 강한 선입견으로 <해인>과의 인연은 상상하지 못했다. 과거나 현재나 문중을 초월한 곳이 바로 해인총림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내가 해인사 강원 출신이에요. 그 때는 송광사에 강원이 없
었으니까. 난 강원의 학인이었죠.”알고보니 현장 스님은 <해인>의 역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 <해인>과 그리 오랜 인연은 아니었지만 ‘시작이 반’이라 치듯 원래 시작이 어려운 법인데 <해인>을 시작했으니 그 공로를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보성 천봉산 깊숙한 계곡 끝에 위치한 백제 고찰 대원사에서, 20년을 거슬러 올라가 <해인>의 창간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러니까 현장 스님이 해인사 강원의 학인이었던 80년대 초반, 해인사에서는 강원 학인들이 돌아가며 소임을 맡아 사중 일을 도왔다. 현장 스님도 차례가 돼 맡게 된 일이 포교부장이었다. 포교부장이 하는 일은 홍제암에서 하는 중학교불교학생회를 지도하는 일.
“당시 강원 중강이던 현응 스님이 야로중학과 가야중학생 법회를 하면서 불교학생회가 발족되었는데, 법회 활성화를 위해 해인사에서 담당했었지요. 포교부장은 불교학생회를 지도하는 역할이었지요. 학생들에게 불교를 쉽게 알려 주기 위한 포교지 겸 소식지로 <해인>이 만들어졌습니다.”원래는 지금 직지사 박물관장을 하고 있는 흥선 스님이 포교부장을 맡았고, 현장 스님은 도서관장을 하게 되었다는데, 인연이 그러했던지 흥선 스님이 포교부장은 자신이 없다며 직책을 바꾸기를 청해, 도와준다는 전제조건하에 맡게 된 일이었다.
이렇게 <해인>은 불교학생회의 회지로 시작됐다. 그것이 導2년 3월의 일이다. 제호 ‘해인’은 일주문 현판에서 집자하였고(후에 대장경에서 집자한 것으로 바뀌었다.), 1호의 면수는 4면. 2호부터는 8면으로, 導5년 문공부에 정식으로 등록하고 32면으로 증면하기까지 <해인>은 8면을 유지하였다.


현장 스님에게 있어서도 <해인>은 문서포교에 발을 들여놓은 첫걸음이었다.
첫호를 내자마자 <해인>은 단순한 학생회의 소식지라는 초기 발상에 변화를 시도했다. 해인사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절을 소개하는 책자가 없었다.
따라서 불교학생회의 회보인 동시에 관광객들에게 해인사를 소개하는 책자로서의 역할도 겸해보자는 스님의 예리한 감각이 작동한 것이다. 사실 이는 <해인>을 지속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이기도 했다. 절에서 보조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재정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로 개편돼 나온 <해인> 2호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고 스님은 회상한다.
“앞면에 성철 스님의 법문을 싣고 뒷면에 컬러 사진과 함께 해인사 벽화이야기를 넣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스님의 법문은 일반인들도 알 수 있는 쉬운 것으로 부탁을 드렸는데, 실제 만나뵙기 힘든 스님을 지면을 통해서나마 만날 수 있게 되니 무척 좋아하더라구요.”성철 스님의 법문은 이 때 처음으로 지면상에 공개되었다. 평소 큰스님의 법문 말씀을 원택 스님이 풀어 공책에 정리한 것을 부분 부분 나누어 실었는데, 후에는 법문을 모아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법당에서 돈 놓고 비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바로 불공”이라고 가르치신 스님의 쉬운 법문은 지금 다시 봐도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벽화이야기’ 역시 절에 오면 늘 보게 되는 벽화에 담긴 배경과 설화를 이야기해줌으로써 해인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 이 되었는지, 일반인들의 반응이 좋았다.
또한 해인사 학인 스님들이나 산내 암자에 머물고 계신 스님들의 글들을 실었는데, 일타 스님 같은 큰스님을 비롯하여 여연 스님같이 이후 불교계의 주요 필자가 된 스님들의 초기 신선한 글들이 실려 있다. 지금이야 각종 책이나 홍보책자가 쏟아져 나와 흔히 볼 수 있지만 매체가 흔치 않았던 때라 의미가 컸다.
판매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스님은 인쇄나 종이질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유익한 내용을 좋은 그릇에 담겠다”는 생각으로 아트지에 컬러를 넣었다. 인쇄소는 베네딕트수도원에서 하는 분도인쇄소를 택했다. 독일 신부님들이 운영하는 이 인쇄소는 그 당시 최고의 인쇄 시설을 갖춘 곳이다. <해인>이 나올 때만 해도 사보를 내는 곳도 거의 없었지만 낸다 해도 누런 시험지 종이에 조잡한 편집 상태였음을 생각할 때, <해인>은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리고 그 기획은 성공했다.
“2호서부터는 장경각에 무인판매대를 두고 한 부에 100원씩을 받았어요. 초판을 5천부 찍었는데 무인판매대에서 보름만에 동이 나더라구요. 몇 번 재판에 들어가 찍기를 반복했는데 그래서 3호는 4만부를 찍었어요.”무인판매대에서는 1만부당 80만원 정도가 나왔다. 열에 여덟 사람은 돈을 내고 가져갔다는 소리다. 관광객이 가져가 외부에서 1년 정기구독 신청도 잇따랐고, 산내 암자의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보내주려 한다며 주소를 가져다 주며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년 구독료는 1,000원.
한 암자의 비구니 스님은 수십명의 주소를 적어와서는 잘 만들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보람을 느끼게 했는데 그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한 말씀.


“스님 참 잘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야 사람들이 변소간에서 밑 못닦아요.” 지금이야 흔한 게 두루마리 화장지이지만, 신문지를 가로 세로 알맞게 잘라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하던 때인지라, 빳빳한 아트지라 밑닦기 적당하지 않았던 게 그 비구니 스님에게는 가장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성철 스님도 무척 좋아하시며 한달에 한 번 백련암에서 개최되는 아비라 기도 때 신도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주시기까지 했다. 필자들 역시 지금은 돈을 받고 글을 쓰지만 당시는 돈을 내고 글을 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처음에 걱정했던 재정은 어렵지 않게 해결을 보았다. 사중에서 한푼도 지원받지 않고도 <해인>은 스스로 굴러갔다.
홍보지가 무척이나 귀하던 때 나온 <해인>은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 보람은 있었으나 덕분에 스님은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학인 신분에서 했던 일이라 강사 스님의 눈총을 얼마나 받았던지.
“바쁘더라구요. 구독신청이 많아지다 보니 발송하는 일만도 큰일이었지요.” 이 때 스님을 도와 함께 <해인>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지묵 스님과 흥선 스님.
강원을 졸업하고서는 우화당에 따로이 편집실을 만들어 <해인>을 만들었다. 현장 스님은 사중에서 한푼의 지원도 없이 <해인>을 만들었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요즘 사보가 많이 나오지만 사중 지원 없이 운영되는 곳이
몇이나 될까 싶어요. 그러다 보니 몇 해 나오다 말고 하지요.
일단 재정적으로 독립돼야 지속될 수 있습니다.”이렇게 해인을 멋지게 출범시킨 스님이지만 <해인>과의 인연이 오래 지는 않았다. 송광사의 요청으로 부득이 <불일회보>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 導4년 2월이었으니까 스님의 <해인>과의 인연은 2년이었다.
지금 보면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8면짜리 <해인>이 이렇듯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것은 워낙 부실한 문서포교의 현실에도 기인하지만, 누구나 궁금해 하는 점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편안하게 접근했던 데 있었다고 현장 스님은 말한다.
“대상의 수준을 중학생 수준에 맞추었기 때문에 불자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대부분의 매체들이 독자들의 눈높이를 너무 높게 잡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도 제 생각은 마찬가지인데 잡지, 특히 포교지의 눈높이는 중학생에 맞추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해인>지 외에도 현장 스님은 불일회보와 불일서점을 통해 불교계의 문서포교에 훨씬 많은 기여를 해왔다. 특히 불일서점은 불교서점이 전무한 불교계에 서점 붐을 조성하였고, 탁월한 안목과 감각으로 세련되면서도 깔끔한 불교용품을 개발함으로써 촌스럽던 불교용품의 격을 높인 선구자이기도 하다.
서점에는 외국인과 타종교인들, 특히 가톨릭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이는 스님이 <해인>을 만들면서 가톨릭 신부들이 운영하는 인쇄소를 이용하면서 그들이 종교용품을 어떻게 만드는지 눈여겨 봐두었다가 불교용품에 활용하다 보니 그들의 입맛에도 맞았던 모양이다.

“그네들은 그런 용품을 잘 만들어요. 신부들이 그런 일을 하는데 우리처럼 그런 일이 하나의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수도생활이라고 보더라구요. 그것이 참으로 인상적입디다.”현장 스님에게 있어 <해인>을 만들던 시기는 문서포교의 견습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인>도 현장 스님을 통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지만 현장 스님 역시 자기 자신 내부에 숨어 있는 문서포교를 할 수 있는 능력의 싹을 <해인>을 통해 비로소 발아시킨 셈이다.
그런데 지금은 문서포교에서도 한 발 물러서 있다. 참선과 티베트 박물관 개설에 정성을 쏟고 있는 스님에게 불쑥 불일회보 시절도 아닌 그 이전 <해인>지 시절을 말해달라 하니, 벽장 속에 던져놓아 먼지 풀풀 날리는 잊혀졌던 한지 속 보이지도 않는 글들을 읽어내려는 듯 무척이나 애를 쓰신다.
일단은 <해인>이 20년이 됐다는 소리에 무척 놀라움을 표시하며, 불교계 스님들이 하는 일이 이렇게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은 해인사이기에 가능한 ‘기적 같은 일’이라고 감탄한다. 그러나 글에 집착하지 않으니 글이 술술 나오듯이, 한 발 떨어져서 보니 완전 독자의 입장에서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훨씬 잘 보인다며, 사랑의 비판도 아끼지 않는다.
“요즘은 사실 문서포교가 귀하지 않아요. 편집장이 독자보다 많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러나 제대로 된 글들은 여전히 귀합니다. 잡지에서 좋은 글이란 필자들이 만족하는 글이 아니라 독자들이 좋아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요즘은 독자의 욕구보다 필자들의 발표욕구를 충족시키는 경우가 많다는생각이 들어요.”‘중학생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 현장 스님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다. 중학생이 읽을 수 있으면 어른도 읽는다는 얘기.
그런 의미에서 요즘 <해인>은 너무 눈높이가 높다고 일침을 놓는다. 또한 작은 제목 하나 없이, 너무 작은 활자의 계속되는 나열은 모양은 예쁠지 모르나 독자에게 친절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해준다.
스님은 요즘은 점차 사이버시대로 진행됨에 따라 <사이버 해인>에 좀더 주력하는 것도 제안한다. 활자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시대적 조류가 정보시대로 진행됨에 따라 불교도 이에 발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현장 스님의 생각이다.
확실히 활자매체는 위기를 맞고 있다. “그래도 활자의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 아직은 설득력있게 들리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활자의 영향력의 영역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불교 잡지 역시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생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한 치 앞보다 항상 발밑의 돌부리가 늘 더 다급하다. 지금 당장은 눈높이를 중학생 수준에 맞추라는 스님의 주문이 더 머리를 조여오고 있으니.

□취재·글/이연정


출처: 월간 해인 2002.03(2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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