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벽치기 기원문(祈願文)

제가 떠난 근원을 돌아보는 것은
저를 알고 근본을 알아 더 나아 갈 힘을
모으기 위함이라.
흐르다 땅 밑으로 숨어버린 줄기…
단념하지 못하여 누추했으며
포기하지 못하여 남루하였으니…
어리석은 시절이 죄를 지었습니다.
무심함이 죄를 지었습니다.
본래의 기운을 일으키는 때,
가라앉아 잠든 기운을 깨우기 위해서
숨어서 흐르는 물이 때로는 폭포가 될
필요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격변하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킬 칼을 주십시오,
어떤 시대의 어떤 질서에도 휘이거나 녹슬지 않는…
나와 내 자손과 내 이웃을 지켜 서로 서로를 상하지 않도록…
오래전에 우리가 스스로 모멸하여 우리 핏속에 감추었던
지킴이의 칼을 주십시오.
묻혀버린 시간의 저쪽에서
아직도 형형히 빛나는 지킴이의 칼을 주십시오.
땅 밑으로 숨어서 흐르는 물처럼
그들의 감춘 뜻을 품고
흘러 흘러서 돌아올 겁니다.

(정복근作, 희곡 ‘지킴이’ ‘검은새’ '숨은물’ '덕혜옹주’ 에서 발췌)

▲ 발등을 더 구부리고! - 날카로운 사범님의 지적

ⓒ2005 정혜자

“자세 낮추고”, “무릎 더 꿇어”, “시선은 항상 멀리” 멀리서 고함소리가 쩌렁 쩌렁 산을 울린다. 도심보다 체감온도가 더욱 떨어지는 산중. 움직이지 않으면 얼굴과 손의 감각이 없어질 만큼 칼바람이 부는 날씨 속에 검은 티셔츠 하나만 입은 30여명의 젊은이들이 대나무봉을 들고 서 있다. 전통무예의 하나인 “수벽치기”를 배우는 중이다.

이번 수벽치기 전국 대학생 캠프는 (주)디아지오 코리아 후원으로 전남 보성군 천봉산 대원사에서 14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된다. 어깨 털기, 내려베기, 제기차기 등 한 동작마다 사범의 시범이 있고 수련생들이 따라한다.

▲ 졸음과의 사투중 - 좌선을 통한 정신 수양

ⓒ2005 정혜자

수벽치기란 손뼉을 쳐서 기를 발생시키는 것을 기본동작으로 한다. <고려사>에 수박, 수박회로, <조선왕조실록>에 수벽, 수벽타로 기록되어 택견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한국의 전통무예다. 자칫 그 맥이 끊길 뻔한 수벽치기는 택견 인간문화재 고(故) 신한승 선생으로부터 육태안(51세) 선생이 전수 받았다. 육태안(수벽치기 계승자, 52세) 선생은 “기술을 가르치자면 부족한 일정이지만 우리 문화에 깃든 정신을 접해보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인생의 폭을 넓혀 보라”는 취지에서 행사를 기획했다고 한다.

몸에서 훈기가 날 때쯤 겨우 한숨 돌리는 10분간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격투기를 배웠으나 수벽치기의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이 좋아서 신청했다는 안인일(대학생, 22세)군은 “봉 돌리기가 어려워요. 한번 꼬이니까 더 안 돼요”라며 난감한 표정이다. 3시간의 강훈련을 마치고 먹는 발우공양. 한창때의 식성, 게다가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한 뒤의 식사다. 마음은 게 눈 감추듯 이지만 음식이 되기까지 수고한 이들을 생각하며 천천히 먹어야 한다.

남자친구의 권유로 동참하게 된 귄희정(한동대, 23세)양은 “(발우공양 뒤) 그릇 씻은 물 마시라고 해서 처음엔 농담인줄 알았다”며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동작들이 한국적이란 생각이 들고, 체력이 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 거문고 가락에 맞춰 검무 시연

ⓒ2005 정혜자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향기로운 국화차 한잔을 놓고 강의를 듣는 시간. ‘한·중·일 3국 무사들에게 나타나는 사생관’에 이은 두 번째 강의의 주제는 ‘무(武)와 예(藝)는 하나다’다.

우리 음악과 서양음악에 흐르는 정신문화의 차이점, 거문고에만 있는 현의 이름 등의 강의가 끝나고 시연이 있었다. 술대(거문고를 타는 막대)와 현이 부딪히며 “둥~” 거문고가 울리면 그 파장을 따라 목검이 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소리가 장중하면 동작도 힘차고, 소리가 나긋하면 동작은 무술이 아닌 춤이 된다. 방안에 앉아있는 30여명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무(武) 와 예(藝)가 하나가 되는 기운이 닿은 것일까. 방문을 여니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 칼끝을 더 내려야지! - 정륜스님의 지도

ⓒ2005 정혜자

“전공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지만 좌선, 다도 등 전통 문화 체험을 곁들여서 외공과 내공을 함께 쌓는 자리”라고 행사를 소개한 대원사 정륜 스님은 “앞으로 정기적으로 1년에 2차례 정도 수련회를 정례화 시키고 젊은이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해 볼 예정이며 수벽치기라는 무술을 통해 고유한 한국의 전통 무예 정신과 문화가 계승, 발전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 천봉산 대원사에 위치한 수벽치기 수련원

ⓒ2005 정혜자